항목 ID | GC056A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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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현대 | 1946년 - 하상래씨가 광주에서 출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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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2012년 - 야사리의 규남 박물관 개관 |
현대 | 1960년 - 하상래 씨 광주에서 야사리로 이사 |
마을지 | 하상래 집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백아로 3103 |
마을지 | 규남 박물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백아로 3109 |
마을지 | 싸리재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하백원 선생의 정신과 규남 박물관]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1구에는 시골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박물관이 하나 서 있다. 고풍스러운 한옥 처마지붕에 묵직한 나무대문이 인상적인 박물관은, 바로 조선 후기 호남의 4대 실학자인 규남 하백원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하상래 씨가 세운 ‘규남 박물관’이다. 하상래 씨는 규남 할아버지의 실학 정신을 새기고 그 정신을 세상에 알리고 이어가기 위해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부자는 아니다. 재원 마련이 궁금하다고 하니, 국가에서 건물 지을 돈은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건물 지을 땅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서 지난 몇 년은 땅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 어른들을 쫓아다니고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상래 씨가 실학 정신에 빠져들고 선조의 박물관을 열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한다.
“농업 은행에 다니셨던 아버지가 학구열이 굉장히 강했어요. 하여튼 자기 스스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실 정도였으니까. 농업 은행을 그만두고 여기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도 하여튼 학자셨어요. 내가 이만큼 생활을 하고 사는 것은 전부 우리 아버님이 입으로라도 가르쳤던 것을 보고 배운 결과요....”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이기에 오늘날의 규남 박물관도 존재하게 된 것이리라.
[하백원 선생의 후손 하성래․하상래 형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형제들 모두 야사 마을 태생이지만, 하상래 씨는 해방 후인 1946년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본래 야사리에서 살던 아버지가 광주의 농업 은행에 취직하게 되면서 광주로 나와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6·25 전쟁을 피해 이곳 야사리로 다시 들어오게 되면서 유년 시절은 이곳 야사리에서 보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님들이 체구도 작고 어린 자신을 매일 같이 업고서 ‘싸리재’를 넘어서 학교를 데려다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다시 1960년에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님 덕분에 가족들이 모두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광주에서 서점을 운영하였는데, 그 서점을 둘째아들인 하상래 씨 본인이 가업처럼 이어받아 1995년도까지 열었었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를 낳고 교육시키는 동안 하상래 씨는 자신이 규남 선생의 자손임을 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2년에 이종범 교수가 주관하는 ‘역사인물기행’ 참가를 계기로 선조인 규남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결국 오늘의 규남 박물관을 건립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상래 씨는 현재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지만 자주 야사 마을을 왕래한다. 하씨 형제[하상래, 하성래]는 규남 박물관 근처에 나란히 집을 지어 놓았다.하백원 후손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규남 박물관에 들어있는 유물 중 대부분은 형님인 하성래 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형님께서 할아버지의 유물을 모두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하려던 것을 자신이 설득을 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란다. 그는 2012년 4월 규남 박물관 개관식에서 형님 하성래 씨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6·25 전쟁 때 마을 전체가 불타서 사람들이 모두 쌀을 짊어지고 피난을 가는데, 형님 혼자만 조상들의 책을 넣은 궤짝을 짊어지고 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굶어죽지 않으려면 쌀을 가지고 가야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짊어지고 간다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하상래 씨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 집안의 뿌리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참, 형님이나 동생에 비해서 정말로 무식하고 안배웠는데도. 내가 이런 일이라도 하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정신적인 것이 있었지 않나 합니다.”
[하백원 후손으로서의 바람]
야사리는 규남 하백원 선생의 탯자리이기도 하지만, 마을 전체에 실학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하상래 씨는 하백원의 후손으로서 야사 마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광주에서 40여년을 살다, 마을에 와서 본 것은 다른 시골 마을에 가면, 물론 깊이 들어가면 다르겠지만. 지금도 자력으로라도 하채호 면장님 집처럼 엿을 만들어서 판다, 산자를 만들어서 판다, 하는 그런 것들을 아주 잘해요. 관에서 하나도 보조가 없어도. 그런 것들을 내가 보기에 아주 잘해요. 몇 년동안 쭉 보니까 그런 것에서 소득을 올리고. 참말로 실학 정신이 있겠다. 뭐 그렇게 보여요. 하여튼 앞으로 소망은 실학 마을화시키고 싶고, 야사 마을에 실학이 있었다는 것을 좀 더 알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고 그래요.”
하상래 씨의 다짐처럼 규남 박물관이 있는 야사 마을이 호남 실학의 메카가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믿어본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