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3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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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당산제 축문을 쓰다]
‘立春大吉(입춘대길) 建陽多慶(건양다경)’. 2013년 올해 입춘 날 마을 회관 입구에 붙혀놓은 입춘첩이다. 이 입춘 글씨는 올해도 어김없이 마을의 정기호 씨가 도맡아 썼다.
“어저께도 농협에 가서 입춘대길 그것 써주고 왔어. 여기 이서농협 지점에서 5일 전부터 입춘날 와서 글씨 좀 써달라고 부탁해서 어제도 오후에까지 입춘대길 글자를 써주고 왔어.”
조사자가 마을 회관에서 만난 정기호 씨에게 인사를 하고 입춘첩의 글씨가 멋지다고 하자, 이서 농협에 붙인 입춘첩도 자신이 쓴 글씨라고 살짝 자랑을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입춘대길과 같은 글자는 동네에서도 한학에 조예가 있는 분들이 하는 것이고 보면, 정기호 씨의 입춘첩 자랑도 당연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한문 실력 덕분에, 정기호 씨는 이장을 맡은 1984년부터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마을의 당산제 축문을 쓰고 있고, 당산제를 지내기까지의 전 과정도 지휘해오고 있다. 그런 만큼 마을 당산제에 대한 애정도 깊다. 야사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으로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모셔진다. 총 세 군데의 당산나무에 제를 모셔왔는데,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당산제의 역사도 깊고, 또한 당산 할머니의 영험함도 세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마을 사람 중에서 아이 갖기를 소원하는 사람이나 자손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당산제를 모시려고 했었단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심도 바뀐 탓에 지금은 서로가 당산제를 맡지 않으려고 하니 정기호 씨는 걱정이 태산이란다.
“84년도부터 내가 마을일을 봤거든요. 그때부터 당산제를 어르신들한테 물려받아가지고 지대로 그것을 이행해왔제. 그런데 내 밑으로 후계자 양성을 해야 하는데, 인자 몇 사람 없어요. 여기 살다가 맨 도시로 나가버리고 핵가족 시대가 되아버리고 나가버리고 없죠.”
[서당에서 배운 한문]
1940년에 이곳 야사 마을에서 태어난 정기호 씨는 마을에서는 정영기로 통한다. 기호는 호적상의 이름이고 본래 부르는 이름이 영기인 탓이다. 스물두 살 때 화순 역전리에 사는 한 살 연상의 배씨 처녀와 결혼하여, 군생활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외지에 나가 살아본 적이 없는 마을 토박이다. 선대서부터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워낙 농사가 작아서 그리 넉넉한 생활은 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을 서당에 보내준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고.
그 당시에는 아이들도 농사철에는 일을 해야 했기에 서당에는 일이 없는 겨울에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정기호 씨도 겨울에만 서당공부를 했는데, 열두 살 때 처음 서당 공부를 시작해서 5년 정도를 다녔다고 한다. 대개는 서당훈장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한 번 배울 때마다 아버지가 ‘학채’로 쌀 서말을 주었다고 한다.
“겨울을 삼동이라고 합니다. 석달이라는 것은 석삼자 겨울 동자 삼동. 석달을 겨울철에 좀 배왔어요. 월정 뒤에 있는 망월리라고 있는데, 거기서 삼동 다닐 때 맹자를 두 권 읽었어요. 다른 학동보다 빨랐죠. 월산서 다닐 때도 내가 제일 빨랐어. 뭐냐, 구절을 배우면 내가 남들보다 네 개씩 배워버리니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것 말고 근대식 교육은 마을 안에 있는 이서 국민학교[지금은 폐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가난해서 중학교는 가지 못하고 대신 마을 안에 있는 ‘고등 공민학교’라고 아직 인가가 나지 않은 학교에서 배웠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하성래 씨가 방학을 맞아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침 일찍 영어를 가르쳤는데, 거기에서 배운 영어가 지금도 쏠쏠하게 제 몫을 다해준다고 하신다.
“내가 나가서 영어를 좀 배왔어요. 그때 내가 좀 영어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요. 그래가지고 그것을 그때 조금 배웠어도 금 풀어먹댔기 지금 풀어먹어요. 여기 뭐냐, 무쏘나 소나타나 스펠링 다 외잖아요.”
[마을일에 대한 열정]
정기호 씨는 1968년도에 군에서 제대를 하면서부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단다. 그렇게 해야만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까지 먹이고 가르칠 수 있었기에 말이다. 그러면서 차츰 논도 늘리고 하다 보니, 마을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장도 오랜 기간 맡아서 했었고, 의용 소방대장 6년, 농촌 지도자회장 4년, 이서 농협 이사 2회[4년]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또다시 마을이장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또 다시 마을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활동적인 성품을 타고 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것도 다양한 사회활동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새롭게 이장을 맡으면서 정기호 씨는 마을에 소득이 있어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려고 할 것이기에, 이장을 맡으면서 마을의 소득증진을 위해 고민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신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