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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한 사택 아파트와 주택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B010202
한자 炭鑛盛衰-運命-社宅아파트-住宅
분야 지리/인문 지리,생활·민속/생활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연방적의 종연광업주식회사 설립과 탄광 개발 1934년 7월 28일 - 종연방적은 화순무연탄주식회사를 매수한 후 1934년 7월 28일 종연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와타나베를 소장으로 하여 흑토재 일대의 종연탄광 개발을 시작한다
대한석탄공사 설립과 화순탄광 개발 1950년 11월 1일 - 1950년 11월 1일에 석탄 개발을 위한 공영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구암리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가 흑토재 일대의 화순탄광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동암마을 일반 사택 건립 1952년~1955년 - 동암마을에는. 1952년에 8.4평형 1개동(2세대), 1955년에 7.7평형 7개동(28세대)의 소규모 사택을 건립한다.
천운 마을 간부 사택 건립 1955~1961년 - 1955~1961년 천운 마을에 16평~29.5평의 간부사택 17세대가 들어섰다.
화순광업소 노동자 합숙소 건립 1972년 - 탄광 노동자를 위한 합숙소가 21.3평형으로 1개동 3세대 건립된다.
천운 마을 일반 사택 건립 1975년 - 천운 마을에 8평형의 일반사택이 1975년에 2개동 10세대가 건립된다.
최병철 이장 광부로 취업 1980년 - 현재 천운 마을 이장인 최병철씨가 화순광업소 광부가 되다.
천운 마을에 연립주택형 3층 사택 건립 1982년 - 1982년, 천운 마을에 연립주택형의 3층 사택 2동이 건립된다.
천운 마을에 5층 화순광업소 사택 아파트 (화순 오동 사원 아파트) 2동 건립 1990년 - 1990년 천운 마을에 5층 아파트 사택 가, 나동 60세대가 건립된다. 화순군 면 단위 지역 최초의 아파트이다.
마을지 천운 마을 표지석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충의로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마을지 천운 마을회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천운길 12
마을지 화순광업소 사택 아파트 (화순 오동 사원 아파트)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화순광업소 간부 사택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천운길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카센터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세탁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식당(천운식당)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마을지 통닭집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화순군 면 단위 지역에서는 유일한 천운 마을의 광업소 사택 아파트]

화순군 동면 천운 마을로 다가가면, 입구에서부터 여느 촌락과는 다른 경관이 눈을 끈다.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아파트 때문이다. 화순군 면 단위 유일의 아파트 사택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깔끔한 조경과 산뜻한 천운 마을 표지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제 막 지나온 충의로 주변 회색과 검은 빛 경관과는 사뭇 다르다.

충의로에서 천운길로 접어들면 오른 쪽 공터 앞이 천운 마을 회관, 그 앞이 화순 오동 사원 아파트[광업소 사택 아파트]이다. 가, 나, 다, 라 4개 동과 그 건너 마동까지 5개 동이다. 입구 쪽 가, 나동은 입주자가 없다. 출입구는 손잡이가 떨어진 채 나무로 못질이 되어 있다. 집기들이 나뒹굴고 유리창은 깨지고, 창틀도 녹슬어 있다. 1990년에 가동과 나동을 짓고, 1992년에 다, 라, 마동을 지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마을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폐쇄를 건의했단다.

“아파트는 다 광업소에서 지은 거예요. 가, 나동이 22년 전이었고, 나머지는 한 20년 정도 되었을 거야. 가, 나동은 원체 허름하게 지어서 철거를 해야 해요. 사람이 못 살아.” (최병철)

깨끗하게 칠해진 다, 라동 그리고 맞은편의 마동. 위성 안테나, 주차된 차량이 전체적인 마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아파트 입구에 ‘알림: 연탄재 버리실 때 묶어서 버리십시오’ 라는 경비실 안내문이 붙어있다. 탄광 마을에 어울리는 정겨운 문구이다. 베란다 한쪽 벽에는 검은 연탄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2012년 현재 천운 마을은 총 150가구인데 아파트에 100가구가 산다.

“지금 아파트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고 금방 들어왔다 나가고 얼굴도 잘 몰라요. 1, 2년 살고 그러니까 모르지요. 옛날에도 사택 사는 분하고 왕래가 없었어. 지금까지 오다 보니까 좀 마을 사람들하고 등한히 돼 버렸어.. 들고 나고 해 싸니까 같은 마을 사람으로 생각 안 하지. 얼굴도 잘 모른다니까” (조효순, 최병철)

아파트는 원래 광업소 사택이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외부인이다. 최근 10년 간 광업소 다니는 분이 열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주택에 사는 분들과 교류가 없다 보니, 마을 행사인 굴암제에도 서너 명만이 참석한다고 한다.

라동 아파트에 연이어서 나지막한 소규모 주택 4채가 보인다. 쌍둥이처럼 똑 같이 생겼는데, 다행히도 대문은 은색, 하늘색, 초록, 회색 다 다르다. 화순 광업소 간부 사택이다. 노후화 되어 거주자는 없고, 철거를 건의한 상태이다. 야트막한 담 너머 창문 안으로 달력이 보인다.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와 대한 석탄 공사 노동 조합 화순 지부에서 발행한 것이다. 2009년 10월에 멈추어 있다. 4년째 방치 상태인 모양이다. 주택형 사택 맞은편에는 화순 광업소 운동장이 보인다. 사택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젊은 사원들로 활기 넘쳤을 운동장이다. 지금은 화순 고등학교 야구부원들이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 복제된 듯 똑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지어진 간부 사택, 넓은 운동장. 산간 오지에서 맞닥뜨린 이 독특한 경관들은 1980년대까지 번창하던 탄광 마을의 흔적이다. 한때 활기 넘쳤을 마을 입구 충의로도 옛 영화의 한 장면같이 남겨진 뒷모습뿐이다. 그나마 마을 입구 동양 카센터, 동아 세탁소, 천운 식당, 동아 양복점 통닭집이 옛 상가의 모습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이것들이 탄광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는 탄광 마을의 모습이다.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는 광업소 사택 아파트와 주택]

1934년에 화순 무연탄 주식회사를 인수한 종연 방적은, 종연 탄광의 석탄 증산을 위해 사택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산골이라 인근에 주택이 없으니, 우선적으로 탄광 종사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철도에 인접한 동암 마을에는 판자촌 정도의 열악한 사택을 마련한다. 오곡 마을[현재의 천운 마을]에는 간부 사택과 외부 손님을 위한 영빈관 형태의 객실을 갖춘 건물을 건립한다. 서로 다른 유형의 사택 건립은 그 후에도 이어진다.

광복 이후 석탄은 긴급 생활 필수품으로 지정될 만큼 주요 에너지 자원이 된다. 남한의 탄광 생산 능력이 국토 전체의 20%에 불과하고, 그나마 개발도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2년 11월 1일 공영 대한 석탄 공사의 설립과 함께 연료난 해결을 위한 탄광 개발은 한층 고조된다.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는, 탄광 개발과 늘어나는 종업원들의 사택 건립에 힘쓴다. 초기에는 일제의 판자촌 사택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기둥에 흙을 덧발라서 보완한다. 사택 건설은 동암 마을과 천운 마을에서 활발히 진행된다.

동암 마을에는 소규모 일반 사택들이 건립된다. 1952년에 8.4평형 1개동[2세대], 1955년에 7.7평형 7개동[28세대]를 건립한다. 10여년 전에 철거되어서 현재는 밭으로 이용하거나, 빈터로 쓸쓸히 남아 있다. 남겨진 터를 보니, 정말로 작은 사택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에는 21.3평형[3세대] 합숙소를 짓는다. 1975년~1977년에는 8평형의 신 사택 15개동[23세대], 연립사택 7동[28세대]이 건립된다. 이렇듯 동암리는 일제 강점기부터 최대의 사택 및 근로자가 운집된 탄광 마을이었다.

“제일 많이 살았제. 엄청 많았지. 이발소, 목욕탕, 세탁소도 전부 거가 있었제.” (윤대림)

구암 마을에는 집단적 사택이 건립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탄광 호경기와 함께 120여 가구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 구암1구 구봉산 마을의 경우, 판자집이 길게 이어졌었다. 현재는 13가구 중 4가구만이 광업소 근로자이다.

천운 마을에는 간부 사택도 들어선다. 1955년에서 1961년에 걸쳐 간부 사택 15동[17세대]이 건립된다. 이들은 단독 주택이고 규모도 비교적 큰 29.5평, 21평, 16평형이다. 지금은 운동장 맞은편에 4개 동만 남아있다. 단순한 형태의 맞배지붕 주택으로 열린 창문, 녹슨 틀과 하얀 먼지가 오랫동안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하다. 현관 입구 한 켠에는 신발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1975년에는 소규모 일반 사택[8평형 2개 동 10세대]도 건립된다. 1980년에는 획기적으로 연립 주택형 3층 사택 13평형 2개동[36세대]이 건립된다. 1990년에는 5층 아파트 가, 나동 30세대가 건립된다. 지금 남아있는 화순 오동 사원 아파트이다. 이어서 1992년에는 다, 라, 마 3동의 아파트가 건축된다.

[탄광 쇠퇴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택]

이렇게 탄광 개발과 함께 시작된 사택 건설은 1990년대 초까지 꾸준히 증가한다. 산골에 아파트라는 대규모 사택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저무는 탄광 경기와 함께 사택은 하나 둘 비기 시작한다. 탄광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사택이다. 대다수 근로자가 떠나자 사택만 남았다. 일터를 좇아 왔던 사람들이기에, 떠나면 마을과의 연결고리가 끊긴다. 지금은 아파트사택에 탄광과 관련 없는 외부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때는 인근에 아파트가 없어서 교사들이 입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주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외지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대체로 기존 마을 주민들과 교류도 없다. 어쨌든 입주자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빈 사택은 흉물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빈 사택은 철거하고, 마을의 새로운 활력소 방안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사택의 기능이 없어져도 역사적, 건축적, 문화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학술적 연구도 있다.

화순 광업소에서는 아직 채탄이 이루어지고 있고, 탄광 마을에서는 탄광에서 근무했거나 근무하는 분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 분들과 사택은 옛 탄광의 살아있는 역사이며 문화이다. 사택의 철거만이 최선일까? 마을 활성화를 위한문화, 역사 자원으로의 활용 전략이 개발되고 실현되기를 고대해 본다.

[정보제공]

  • •  윤대림(남, 1933년생, 동면 복암리 구암 마을 주민, 보성상회 운영)
  • •  조효순(여, 1953년생,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부녀회장)
  • •  최병철(남, 1953년생,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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