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댐 건설 반대 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35
한자 龍潭-建設反對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87년 11월 - 용담댐 건설 계획 추진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9년 5월 30일연표보기 - 용담댐 건설 반대 투쟁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89년 7월 6일 - 용담댐 수몰 지역 주민 궐기 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91년 7월 - 용담댐 보상 대책 위원회 결성
종결 시기/일시 1997년 8월연표보기 - 용담댐 건설 반대 투쟁 종결

[정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에서 주민들이 용담댐의 건설에 반대해 벌인 투쟁.

[개설]

용담댐은 한국 수자원 공사가 1990년에 착공하여 2001년에 완공한 다목적 댐이다. 총 저수량 8억 1500만 톤으로 국내 5번째 규모인 용담댐은 수몰 면적이 31.5㎢로 진안군의 용담면·안천면·상전면·정천면·주천면진안읍 등 6개 읍·면의 63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용담댐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6개 시·군에 생활·공업 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며, 연간 1억 9800만 ㎾의 전력을 생산한다.

[역사적 배경]

용담댐 건설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용담댐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 토지는 농지 개혁에서 제외되어 1960년까지 수몰 예정 지역 주민들은 소작인으로 살아야 했다. 소작료 불납 운동과 소송을 통해 1960년에 농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은 1989년에 용담댐 건설 계획이 다시 확정·발표되자 조직적으로 반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경과]

1939년 조선 총독부는 금강 수계 수자원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용담댐 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수몰 예정 지역은 용담·정천·상전·주천·안천·진안·동향 등 7개 면이었으며 수몰 예정 가구는 약 4,000호, 수몰 예정 인구는 약 3만 70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용담댐 건설은 수풍댐 건설 다음으로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1943년 당시 수몰 예정지에 살던 주민들의 전답과 가옥 등은 조선 전업 주식회사[지금의 한국 전력 공사]에 강제 수용되었다. 1993년 전북 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32.5%가 일제 강점기에 토지를 강제 수용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주민들은 토지를 강제로 수용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용담댐 건설 계획은 자연스럽게 취소되었으나, 용담댐 건설 예정 지역은 국가 기간 산업 용지라는 명분으로 농지 분배에서 제외되어 1950년대까지 소작료를 납부해야 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7개 면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여 소작료 불납 운동을 전개하고 주민 대표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함으로써 소작료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주민들은 1960년에 농지를 분배받고, 1968년에 상환을 완료함으로써 소작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1966년에 용담댐 건설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종합 개발 공사에서 몇 개월 동안 현지 지질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즉각 조직적 대응을 하여 1966년 하반기에 주민들은 금강 수몰 지구 주민 이주 대책 위원회[위원장 문학만]를 구성하여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다시 금강 수몰 지구 피해 보장 대책 위원회[위원장 김영의]를 조직하여 제2차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1978년 금강 수계 개발 사업에서 대청댐 건설이 확정되면서, 정부는 전주 일대의 급수난이 해결되었다는 판단에서 용담댐 건설 계획을 중단했다. 1986년에는 한국 전력 공사가 농지 이외의 대지와 기타 토지를 주민에게 증여함으로써 용담댐 수몰 예정 지역 주민의 토지 문제는 해결되었다.

1987년 11월 전라북도 장기 종합 개발 계획에 따라 전주권 2단계 지역 개발 사업 예비 타당성 조사에서 용담댐 건설 계획이 다시 부각되었고 1989년 8월 전주권 2단계 지역 개발 사업 2차 타당성 조사에서 용담댐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주민들은 1989년 5월 28일 용담댐 반대 용담면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고, 5월 30일에는 용담댐 수몰 예정 지역 5개 면의 대표들이 용담 복지 회관에 모여 용담댐 결사 반대 진안군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회는 6월부터 방송과 언론에 댐 반대를 홍보하고, 정당과 관계 부처에 여러 차례 댐 건설의 중단을 건의하였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1989년 7월 6일 진안읍에서 수몰 지역 주민 4,000여 명이 궐기 대회를 개최하여 국도 26호선[전주-모래재-진안]을 점거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과정에서 주민 중 부상자와 구속자가 발생하였다. 그 후 주민들은 수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5개의 대안 댐 계획을 제시하여 토론회를 열었으나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용담댐 결사 반대 진안군 투쟁 위원회는 이후에도 댐 건설 반대 궐기 대회를 주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91년 11월에 용담댐 건설 기본 계획이 공고되고, 1992년 12월 26일 용담 다목적 댐 실시 계획이 승인되면서, 용담댐 관련 문제는 이주 및 보상 대책 문제로 전환되었다. 주민들은 1991년 7월에 용담댐 보상 대책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조직은 용담댐 대책 위원회로 확대되었다. 주민 내부에서도 댐 건설 반대를 주장하는 투쟁 위원회의 입장과 충분한 보상을 받아내자는 대책 위원회의 입장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보상이 시작되면서 쟁점은 보상 문제·이주 대책·이주 단지 조성 등으로 전환되었다. 오랜 갈등 끝에 1997년 8월에 주민과 수자원 공사가 합의함으로써 보상과 사업 추진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결과]

1997년 8월에 주민과 수자원 공사가 합의함으로써 댐 건설 사업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 현재 용담댐은 정상 가동 중이고 수몰 예정 지역 주민들의 이주도 완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용담댐 건설 계획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등장하여 1990년대에 다시 문제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정부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정책 집행에 피해를 받아 온 주민들이 1990년대에 동일한 일을 다시 겪게 되자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었다. 용담댐 건설 반대 투쟁은 정부의 밀실 행정·관 주도의 일방 집행·주민 참여 배제 등에 대한 주민의 불신에서 비롯된 권리 회복 투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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