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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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薪旨里古宅- |
이칭/별칭 | 신지리 민속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문화재 | 섬암 고택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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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 도일 고택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37 |
문화재 | 운강 고택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69-1 |
문화재 | 만화정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82-1 |
문화재 | 명중 고택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67-1 |
문화재 | 운남 고택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267-2 |
문화재 | 선암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335 |
성격 | 마을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밀양 박씨 집성촌이자 고택이 밀집한 마을.
[개설]
만석꾼의 외손자인 밀양인 박하담(朴河淡)이 이서면 수야리에서 이곳으로 와서 별서를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박하담의 후손들이 의병을 일으킨 중심지였다.
[명칭 유래]
신지는 선마리라고 부르고 섶마리라고 쓴다. 섶마리란 섶다리가 있는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섶다리는 동곡에서 신지리로 통하는 다리가 있기 전에 가을이면 나무를 가지고 다리를 놓았다가 여름에 큰비에 떠내려가도록 한 것을 말한다.
신지리에는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6호인 청도 운강 고택 및 만화정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인 섬암 고택, 도일 고택, 명중 고택, 운남 고택 등이 밀집해 있어 신지리 고택 마을이라고 불린다.
[형성 및 변천]
신지리 고택 마을은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이 청도군 차북면 수야리에서 풍광이 멋진 신지리에 소요당을 짓고 장구지소(杖求之所)로 삼은 후,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신지리에는 운강 고택과 섬암 서원을 위시해서 약 40동의 기와집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고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운강 고택[중요 민속 문화재 106호]
신지리 고택 마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당 터를 세운 조선 후기 주택이다. 1809년(순조 9) 박정주의 살림집으로 지은 후, 1824년(순조 24) 운강 박시묵이 증축하였다. 주택으로는 드물게 규모가 크며, 안마당과 안채 후원, 사랑채 후원 등 넓은 여유 공간을 두고 있다. 건물 배치는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튼 ‘ㅁ’자형 건물군을 결합시키고 있다.
2. 만화정[중요 민속 문화재 106호]
운문천변에 절벽 위에 세워진 운강 고택의 별서[별장]로, 운강 고택과 함께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1856년(철종 7) 운강 박시묵이 지었으며, 살림집으로 꾸며진 3동의 건물과 본채인 만화정 정자가 있는 ‘ㄱ’자형의 건물과 작은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화정 뒤에는 세심대라는 정자가 있었고 1960년대에 허물어졌다. 언덕에는 지금도 바위에 세심대와 시문들이 새겨져 있다.
3. 섬암 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8호]
박시묵의 아들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세운 가옥이다. 1873년(고종 10) 섬암 박병현이 거주해서 섬암 고택이라고 불린다. 안채를 제외한 중사랑채, 곡간채 등은 일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는 ‘ㄱ’자 형태이다. 모두 남향을 하고 있으며, 대문채는 동남향을 하고 있다. 1990년 국도 확장 시에 대문채에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중사랑채와 헛간채, 중대문채, 정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4. 도일 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1호]
박시묵의 동생인 박기묵이 1899년(광무 3) 합천 군수로 재임 시 건축하였다. 이후 박시묵의 3종질인 도일 박재수의 소유로 되었으므로 도일 고택이라 한다. 안채, 사랑채, 별당채, 헛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각 건물은 ‘一’자형 건물이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로 이루고 있다.
5. 명중 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269호]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이 1881년(고종 18) 별서로 건립된 건물이며, 그의 둘째 아들 명중 박순희가 분가하여 살림집으로 입주하였으므로 명중 고택이라 한다. 정침, 방앗간채, 곡간채, 중사랑채, 사랑채, 대문간채 등 6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ㄹ’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었다. 1990년 국도 공사로 대문간채와 사랑채를 철거하였고, 중사랑채도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6. 운남 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0호]
박시묵의 셋째 아들 박재충의 집으로 1865년(고종 2) 기공하였으나, 1869년 박재충의 사망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 이후 운남 박좌현이 1892년(고종 29)에 완공하고 거주하여 운남 고택이라 부른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이고 사랑채 왼쪽에 안채와 연결되는 문이 있다. 그 안쪽으로는 헛간채와 안채를 분리하여 ‘ㄴ’자형으로 배치하였다.
7. 선암 서원[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79호]
박하담과 김대유의 사후 두 사람의 위패을 모시기 위해 1577년(선조 10)에 건립되었으며, 1676년(숙종 2)에는 군수 서문중이 중건하였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선암 서당이라 하였고,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서원 안에는 강당을 비롯하여 득월정, 선암 서당, 장판고[판목 보관각], 살림채, 문간채 등이 있다. 대문간채로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살림채가 있고 오른편에는 득월정과 가운데 행랑채가 ㅁ’자 형태로 둘러져 있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선암 서당이 북향으로 앉아 있다. 선암 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으로는 방이 들어서 있다.
[자연 환경]
운문천이 감돌아 가는 신지리 고택 마을은 운문천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수리가 안정된 넓은 평야는 경제적 기반을 탄탄히 굳혀주어, 경제가 벼농사 위주였을 때는 상당히 부유한 마을이었다.
[현황]
중요 민속 문화재인 운강 고택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을 비롯하여 다수의 미지정 고택들이 위치한다. 대부분의 가옥들은 개인 소유로 평소 문이 잠겨 있는 상태이다. 사전에 연락하면 만화정 주변에 상주하는 문화 관광 해설사를 통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한편 선암 서원은 2010년 전통 고택 숙박 체험관으로 말끔히 단장됐다. 객실은 2∼ 3인실부터 10∼12인실까지 다양하다. 전통 한옥의 분위기와 아늑함은 물론, 한옥과 어우러진 자연을 즐기며 시골 밥상, 다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