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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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賢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규무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1월 1일 - 박현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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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5년 3월 5일 - 박현경 광업권 등록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박현경 채탄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2월 - 박현경 도일(渡日)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박현경 전남 지주회 입회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박현경 흑토재 일대를 매입하여 동암 탄광으로 명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박현경 호남 은행 감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박현경 화순 청년회 회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박현경 화순 산미 개량 조합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박현경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구암리 일대 탄광 개발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9월 - 박현경 화순 중학교 설립에 5천평 희사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10월 25일 - 박현경 사망 |
출생지 | 박현경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면 향청리 115번지 |
거주|이주지 | 박현경 거주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면 향청리 |
활동지 | 박현경 거주지 - 전라남도 화순군 |
성격 | 화순 탄광 개광자|실업가 |
성별 | 남자 |
본관 | 밀성 |
대표 경력 | 화순 탄광[동암 탄광] 개광자|호남 은행 감사|화순 청년회 회장|화순 산미 개량 조합장|대한 국민회 화순 지회장 |
[정의]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화순 탄광을 개광한 실업가.
[활동 사항]
박현경(朴賢景)[1883~1949]은 7세부터 김여빈(金汝彬)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누이 박농선과 인척 박영효(朴泳孝)의 후원을 받으며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05년 4월 5일 광업권을 등록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아 1908년 채탄을 시작하였으며, 1909년 2월 탄광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도일하였다. 1910년 3월 메이지 대학 예과에 입학히여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과 교유하며 1년 6개월간 유학하고 경술국치 이후 귀국하였다.
1918년 임야 조사령이 공포되고 토지 조사 사업이 종료될 무렵 흑토재 일대의 토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동암 탄광’이라 명명하였다. 박현경은 채굴한 석탄의 일부를 박영효의 주선으로 일본에 보냈으나 수출에는 실패하였다. 1919년 10월 김성수가 경성 방직을 설립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동아 일보』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치수·관개 사업에도 착수하여 도곡면 죽정리에 제방과 농토를 조성하였다.
1925~1927년 일본인 지질학자의 조사 결과 화순 일대 무연탄의 매장량과 상품성이 확인되자 1927년 동면 복암리 구암 마을 일대 탄광에서 본격적으로 채탄에 착수하였으며, 이를 위해 평양 탄광에서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채굴된 석탄은 목포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나, 수익성이 낮아 경영난을 겪다가 동암 탄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종연 방직에 인수되어 종연 탄광으로 개칭되었다.
이밖에도 박현경은 전남 지주회 회원[1916], 호남 은행 감사[1920], 화순 청년회 회장[1921], 화순 산미 개량 조합 조합장[1925]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제방 축조에 사재 1만원을 희사하고 소작료를 4할 이내로 경감하여 “모범적 지주”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으나, 소작인과의 문제로 화순 청년회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잠시 대한 국민회 화순 지회장을 지냈으며, 서민호(徐珉濠)의 정치 활동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7년 9월 화순 중학교가 설립될 때는 농지 5천평을 희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