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2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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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安劇場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자치샘로 49[향청리 9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위경혜 |
개관|개장 시기/일시 | 1963년 - 신안 극장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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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관|폐장 시기/일시 | 1981년 - 신안 극장 폐관 |
현 소재지 | 신안 극장 터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자치샘로 49[향청리 93] |
성격 | 상설 극장 |
면적 | 281석, 개별 좌석, 단층 건물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향청리에 있었던 상설 극장.
[개설]
신안 극장은 281석 규모의 개별 좌석을 갖춘 단층의 극장이었다. 1963년 화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주옥순이 주도하여 만들고, 주옥순의 이종 사촌 김규근이 관리 부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전라남도 읍면 단위 지역에서 개관한 대부분의 상설 극장이 이름을 해당 지역 명칭으로 정했으나 신안 극장은 ‘화순’이 아닌 ‘신안’으로 지었다. 여기에서 ‘신안’은 신안 극장 주인인 주씨 집안의 본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씨 집안 본관은 중국 송나라 신안현(新安縣)이다. 신안 주씨의 시조는 주자(朱子)의 증손자 주잠(朱潛)으로, 그가 중국을 떠나 고려에 정착하면서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씨 집안은 오랫동안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지역의 중심 가문(家門)이었다. 능주는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 시기까지 행정상 화순 보다 상급의 위치를 점하였다. 1600년대 인조가 자신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본관이 능성(陵城)[능주의 옛 지명]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능주를 현(縣)보다 상위 단계인 목(牧)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능주는 화순현과 동복현 보다 상급의 고을로서 화순 지역의 중심적인 지위를 누렸다.
[건립 경위]
신안 극장 설립과 신안 극장의 지역 내 위상을 이해하려면 극장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주옥순의 부친 주재학(朱在鶴)의 활동을 살펴야 한다.
주재학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1921년 동아 일보 광주 지국 관내 화순 분국 분국장(分局長)을 지내고, 1928년 1월 29일 오후 4시에 화순 청년 회관에서 개최된 화순 청년 동맹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화순 청년 동맹 사업의 일환으로 신파극 공연과 농촌 문제 관련 강연회를 펼치면서 지역 주민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그의 뒷집에 살던 화순 탄광 경영자 박현경과 인연이 되어 화순 탄광에 쌀과 숯을 납품하여 재산을 모아 정미소와 직물 공장을 운영하였다. 정미소는 화순군 화순읍 우물터 ‘자치샘’ 바로 옆에 있었고, 명주를 주로 짰던 직물 공장은 주재학의 가옥 바로 옆에 있었다.
직물 공장은 6·25 전쟁 기간 동안 비행기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는데, 휴전 이후 경찰 출신 김석호가 폐허로 변한 직물 공장을 임대하여 가설극장으로 사용하였다. 극장은 직물 공장 양철 파편으로 얼개를 만들고 포장을 둘러쳤으며 여러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를 놓아두었다. 김석호 이후로는 상이 용사회[현 대한민국 상이 군경회]가 맡아 영화 상영을 계속하였다.
6·25 전쟁 이후 화순군은 그야말로 가설극장 전성기를 맞았다. 주재학의 직물 공장뿐만 아니라 지역민이 모이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화순읍 버스 정류장과 화물(貨物) 통운 회사(通運會社) 창고 또는 노천 가설극장에서 할리우드 서부극이 상영되었다. 가설극장은 화순읍은 물론 행정상 화순읍 보다 하위 단위 지역인 화순군 남면이나 동복면·능주면·이양면 등에서 흥행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재학의 딸 주옥순은 군(郡) 소재지 화순읍의 위상에 걸맞은 문화 시설 건립을 주장하는 지역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1961년에 직물 공장 자리에 상설 극장인 신안 극장을 건축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역 계몽 운동에 전념한 아버지 주재학의 지역 내 덕망에 더하여 진명 여학교를 졸업하고 화순 중학교 가사과 교사로 재직하던 여성 엘리트 주옥순에게 극장 건축을 기대한 것은 당시 극장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을 보여준다. 즉 극장을 ‘선진’ 문화 또는 계몽의 공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변천]
화순군은 광주광역시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1년 화순과 광주를 잇는 너릿재 터널 개통으로 양 지역 간 소통은 더욱 활발한 상황이다. 1960년대 신안 극장은 지역에서 규모가 제일 큰 공간이었기 때문에 영화 상영 이외에 국회의원 특별 강연도 열렸다. 신안 극장에서 영화는 대부분 야간에 상영됐다. 대다수 지역민들이 주간에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낮 시간에 극장을 들르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혹 도시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의 경우에는 주간에 상영하기도 했다. 신안 극장의 주요 관객은 화순 읍내와 면 단위 지역민들이었다.
신안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의 필름 상태는 좋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 영화 제작사와 극장 사이에 별도의 배급사가 개입하는 간접 배급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극장은 개봉관과 재개봉관으로 나뉘었고, 신안 극장은 재개봉관으로서 광주시·전주시·목포시·여수시 등의 지방 도시를 거친 이후에야 필름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 신안 극장의 상영 영화는 주로 광주시[현 광주광역시] 동방 극장에서 개봉을 마친 작품들이었다.
영화 개봉 순서가 늦은 탓에 신안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는 필름 일부가 떨어져나가 상영 시간이 줄어든 것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2시간 분량 필름이 40분 정도로 줄어든 것도 있었지만 신안 극장의 영화 상영은 지역민의 인기를 누렸다. 1960년대 신안 극장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저녁 6시 또는 7시 무렵에 영화를 상영하였다. 관객 입장 정도에 따라 하루 2~3회 유동적으로 영사 횟수를 조절한 것이다.
신안 극장이 재개봉관인 까닭에 영화 상영 시기가 늦었지만, 가끔 전라남도 여타 도시보다 먼저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다. 시, 군, 읍 단위 순서로 지역에 따라 차등적으로 매겨진 가격에 웃돈을 챙겨주고 필름을 우선 배급받은 경우였다. 또한 호남 지역을 담당하는 필름 단매(單賣)[배급사가 영화의 배급 권리를 지방 배급 회사에 일정 금액을 받고 판매하는 것] 업자들 모르게 서울에서 상영이 끝난 개봉 영화의 리바이벌 필름을 직접 구하거나 신안 극장에 가끔씩 들르는 보따리 장사 형식의 필름 대여 업자를 통해 영화를 얻은 경우였다.
[구성]
1960년대 신안 극장 최고 흥행 작품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1961]이었다. 신안 극장은 영화 이외에, 여성 국극단(女性國劇團), 악극단(樂劇團), 각종 쇼 단체 공연 등을 극장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화순군이 광주시와 인접한 까닭에 신안 극장 프로그램은 광주시 소재 개봉관 상영 일정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조절하며 구성되었다. 그 덕에 당대 최고 인기 영화배우이던 김희갑, 윤정희, 허장강, 황해, 윤인자, 서영춘, 주증녀 등이 신안 극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광주시에 있는 개봉관에 무대 인사차 방문한 영화배우들이 시간을 내어 신안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영화배우들은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의 연기 장면과 노래를 부르는 일명 ‘아도로꾸 쇼[attraction show]’를 선보였다.
[현황]
신안 극장은 1963년 개관하여 운영되다가 1981년에 폐관되었다. 현재 신안 극장 건물 내부는 점포로 바뀌었으나 건물 외관은 남아있어서 극장 흔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