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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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15대째 이어져 온 진주 형씨 종가 집터]
넓은 마당을 내다보며 양옥으로 정갈하게 지어진 집. 진주 형씨 20대 종손 형광호 씨 내외가 살고 있는 곳이다. 진주 형씨는 도장 마을에 처음 입향한 집안이다. 애초에는 마을 건너편 진주 형씨 조상들의 묘소가 있는 ‘뫼사리’에 정착하였다가 5대조 할아버지가 지금의 집터로 옮겨와 현재까지 15대째 살고 있다고 한다. 한 집터에서 15대가 나오기는 매우 드문 일이기에, 이 집터가 매우 좋은 곳이라고 20대 종손은 강조한다.
집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있던 진주 형씨 20대 종부 유흥자 씨가 “[사람들이] 집터를 잘 잡았다고 했쌉디다.”하며 웃는다. 관리가 힘이 들어서 몇 년 전에 한옥을 헐어버리고 양옥으로 새로 지었지만, 여전히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한다. 그래도 사당(祠堂)과 행랑채가 있던 옛날 한옥에 대한 향수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다.
“우리도 우리 집이 아깝소. 그런디 옛날에는 마람[마름; 초가집의 지붕을 이기 위하여 짚 따위로 엮은 물건인 ‘이엉’의 전남방언]으로 이응께 관리가 힘들어요. 맥없이 자뿔쳐불고[무너뜨려 버리고] 이렇게 했다 싶소. 행랑채랑은 놔둘 것인디.”
[친정에 도움 될라고 시집왔소]
진주 형씨 20대 종부인 유흥자 씨는 올해 59세로, 열여덟 살 때 시집와서 딱 사십년을 한 가문의 종부로 살고 있다. 친정인 나주시 다도면 방산리에서 시집올 때는 그저 가난한 친정에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만 있었지, 종손인지 아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 부자라고 긍께 와봤소 내가. 우리 집은 가난했어. 친정이. 가난했어. 그래갖고 뭐이 어쩌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친정이. 그래서 부자라고 해서 우리집 좀 많이 생각해야 쓰겄다. 그때만 해도 욕심이 많했든가 어쨌든가 오고 잡습디다, 집터가 하도 크닥 했싼께. 긍께 신랑은 안보고 잡고, 집만 보고 잡드랑께 묘허니.”
집터가 크다고 하니 우리 집보다는 부자겠거니 하고, 친정 언니가 시집간 지 한 달만에 급하게 와버린 시집이었다. 시집오던 날은 비가 엄청나게 왔더란다. 가마도 없어서 나주에서 화순 운주사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그 비를 맞으면서 걸어서 운주사에서 도장 마을까지 왔던 신행길. 그렇게 해서 지난 40년간 종부로 살아왔지만 돌이켜보면 그리 큰 후회는 없다고 한다.
[종가집 제사가 일 년에 16번]
시아버지는 인공 때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그때 막 세 살이던 남편 형광호 씨를 두고 시어머니는 재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부모님 시집살이는 없었지만, 대신 시할아버지 내외에게서 종부의 살림을 익혀야만 했다. 시할아버지가 두 명의 부인을 먼저 앞세운 까닭에 세 번째로 맞이한 젊은 시할머니는 어린 종부를 별로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시할아버지가 열여덟 살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종부에게 종가의 제사며 살림살이를 일일이 가르쳐야만 했고, 유흥자 씨는 그런 시할아버지의 가르침에 기꺼이 따랐다.
처음 시집와서부터 진주 형씨 20대 종손 형광호 유흥자 부부가 일 년에 모셔야 하는 제사만 13번이었다. 거기에 설과 보름 그리고 추석 명절제사까지 보태면 총 16번의 제사를 모셔야했다.
“막 시집온게는 일년에 지사만 해도 열시번입니다. 그러믄 거기에 설 세야제, 보름 세야제. 또 추석세야제. 환장해불제. 한달에 두 번도 있어. 오~매 못살아. 혼자 다하제 어떻게 할 것이요? 암 것도 몰라갖고.”
종부의 고된 삶은 16번의 제사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본인의 집인 큰집부터 여섯 집의 일가 아이 도시락을 싸는 것도 큰 고통이었다.
“제사를 13번 모시고. 허. 말도 못해 그때만 해도 애기들이 한 집에 일곱 여덟명썩 벤또[도시락] 다 싸 날르고. 오메. 우리 큰집까지 여섯집인가 여기서 살았거든. 그래갖고 다 인자 뿔뿔히 흩어지고. 인자. 지금은 지사[제사] 놀기제[쉽지].”
지금은 집안 대소가 어른이 주장해서 일 년에 집안 제사를 두 번으로 모시고, 4월 5일에 시제를 모시는 것으로 간소화되었고, 그 많은 일가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며, 농번기에 일가친척들 밥 해 나르는 일도 없어졌으니, 종부도 해볼만 하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결혼 후에 2남 2녀의 자녀를 둔 유흥자 씨는 조사자가 제사가 두 번으로 줄었으니 지금 큰며느리는 편하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저 사람은 암것도 아니제. 덕보제, 나는 옛날에는 열 세 번썩 모셨는디. 말도 못헌당께 사니라고 산 것이.”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