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019
한자 金-和順-樓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신중

[누정 문화의 중심, 화순]

화순 지역은 전라남도에서 누정 문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곳이다. 현재 남아 있거나 관련 문헌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는 화순 지역 누정의 숫자는 모두 186개소에 달한다.

누정은 일상의 주거 공간과는 매우 성격이 다른 별서로서의 공간이다. 주로 시문을 제작하거나, 강학을 베풀거나, 담론을 펼치거나, 손님을 맞거나, 모임을 갖거나, 심신을 닦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즉 누정은 오늘날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소통의 장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화순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소통 문화가 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라남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누정이 분포하였던 곳이다. 1977년 문화 공보부에서 발행한 『문화 유적 총람』 수록 자료의 통계를 보면, 전국적인 누정의 분포 수는 경상북도·경상남도·전라남도·강원도·경기도·서울특별시 순으로 나타난다. 전라남도의 누정만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래의 조사 내용을 종합해 보면, 전라남도의 누정 분포 수는 화순군·나주시·함평군·영암군·순천시·무안군·곡성군·광주광역시·장흥군·장성군·담양시의 순으로 나타난다. 같은 조사에서 현존하는 화순군의 누정은 모두 80개소로 확인되었다. 그중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주요한 누정은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임대정·영롱대, 능주면영벽정, 도곡면삼지재, 동면환산정, 이서면물염정·망미정, 이양면학포당·장범루·송석정·한후정, 춘양면침수정·부춘정, 화순읍의 만화루·고사정 등 15개소이다. 특히 철종민주현(閔冑顯)[1808~1882]이 조영하였던 임대정 원림은 연못과 정자, 수목이 어우러진 풍광이 수려하여 2012년 문화재청에서 명승 제89호로 지정한 바 있다.

[초기의 건립 활동]

우리나라 누정은 삼국 시대 왕실에서 조영한 궁궐 건축에서 비롯되어, 고려 시대를 거치며 관청과 사찰로 건립 주체가 확대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향교와 서원이 그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민간에서도 누정 건축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화순 누정의 역사는 조선 초 지방 관청에서 조영한 공루에서 비롯된다.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화순 지역의 옛 고을이었던 능성현·동복현·화순현의 누정으로 봉서루·응취루·송정·척서루·아풍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송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각 현의 객관 주위에 있던 공루들이었다. 건립 시기는 모두 성종 대 이전으로, 이 중 봉서루만이 1996년에 복원되어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초기 누정으로 화순 향교 만화루와 향사원들의 사정인 서양정이 남아 있는데, 둘 다 15세기 전반인 세종 때 창건되었다. 민간의 누정으로는 조용검의 달관정이 역시 세종 때에 세워졌다고 하나 이미 오래 전에 모습을 감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증 수록된 누정으로는 영벽정·청흥정·취승정이 있다. 모두 관청의 공루로서, 『동국여지승람』의 신증 작업이 있었던 성종 이후 중종 25년인 1530년 사이에 세워진 것들이다. 세 누정 중 영벽정은 지금도 웅장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연주산 아래 지석강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화순 지역 누정의 대표적 명소로 꼽힌다. 영벽정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이곳의 풍광을 매우 사랑했던 진 처사가 우여곡절 끝에 전라남도 장흥 지역에 있는 천관산의 칡뿌리 기둥을 얻어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종명종 대를 지나면서는 민간에서 학포당물염정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선조 대 이후 영롱대·유옥정·부춘정·송석정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의 수많은 누정들이 차례로 세워졌다.

[다양한 소통의 현장으로]

현존하는 화순 지역의 누정은 모두 80개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사·재실·돈대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순수한 누정으로 보기 어려운 건축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면 순수한 현존 누정은 대략 40개소 정도이다.

화순 지역 누정이 가진 소통의 장으로서의 성격을 살펴보면 조선 초에 화순 향교를 비롯하여 옛 능성현에 건립한 만화루와 봉서루영벽정은 모두 공루로서 누대형의 건축 구조를 갖추고 있다. 지역의 향사원들이 세운 서양정 역시 활터의 사정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오랜 내력과 독특한 성격을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중기에 건립된 대부분의 민간 누정은 그 건립 동기에 있어 은일의 뜻이 두드러진다. 학포당·물염정·영롱대·유옥정·부춘정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학포당기묘사화 때 낙향한 양팽손(梁彭孫)[1488~1545]이, 물염정송정순(宋廷筍)[1521~1584]이, 영롱대는 김곤변(金鯤變)1541~1592]이, 유옥정은 남언기(南彦紀)[1534~?]가, 부춘정은 조수겸이 각각 세웠다. 특히 영롱대에는 김곤변의 조카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고기를 잡은 곳이라는 전설이 서려 있다. 때문에 ‘김장군 조대(金將軍釣臺)’라고도 한다. 이 밖에 학포당은 강학처로, 물염정적벽의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시문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의 누정들 역시 은일을 위한 것이 많으면서도 또 다른 성격이 부각되기도 하는데, 양인용송석정홍경고(洪景古)[1645~1699]의 침수정민주현(閔冑顯)[1808~1882]의 임대정은 시문의 산실로서도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후헌(崔後憲)고사정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부친 최홍우(崔弘宇)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고사정이라는 이름은 전란 후 임금이 최홍우에게 하사한 ‘남주 고사(南州高士)’라는 칭호에서 연유한 것이다. 정자 앞에는 ‘의병청지(義兵廳址)’라 새겨진 표지석이 있어 이곳이 전란 당시 최경운(崔慶雲)[?~1596], 최경장(崔慶長)[1529~1601], 최경회(崔慶會)[1532~1593]·최홍재(崔弘宰)[1506~?]·최홍우·최홍기(崔弘器)해주 최씨 일가가 향촌의 유림들과 함께 일어나 의병청을 설치하였던 곳임을 알게 해 준다. 유함(兪唅)의 환산정과 민치규(閔致圭)[1831~1884]의 장범루는 문중 누정의 성격도 지닌 곳이다.

[아름다운 산수와 더불어]

화순 지역은 조선 시대 세 개 행정 구역이 합치며 성립된 곳이다. 옛 능성현·동복현·화순현이 그것이다. 따라서 화순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관청에서 건립한 공루가 많다. 지방 누정 건립은 초기에 관청에서 주도했던 까닭에 화순 지역에는 일찍부터 많은 누정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화순군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누정은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건립되기 마련이다. 화순군에는 동복천·외남천·지석천·화순천 등이 흐르고, 그 유역에 무등산 자락의 적벽을 비롯하여 수려한 명승들이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런 산수를 배경으로 많은 누정들이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융성했던 화순 지역의 누정 문화에서 주목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감성 넘치는 활동이다. 직접 누정을 조영하였던 사람들 외에도 누정을 출입하며 자취를 남긴 숱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물염정에는 조선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많은 인물들이 노닐며 시문을 남겼다. 물염정을 방문하였던 최산두(崔山斗)[1483~?]·김인후(金麟厚)[1510~1560]·권필(權韠)[1569~1612]·이식(李植)[1584~1647]·김창협(金昌協)[1651~1708]·김창흡(金昌翕)[1653~1722]·홍대용(洪大容)[1731~1783]·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의 인물은 모두 당대의 대학자요, 문인이었다. 물염정을 방문한 유명인으로는 이들뿐 아니라 김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방랑 시인 김병연(金炳淵)[1807~1863]도 있다.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을 조롱하며 각지를 떠돌던 그가 만년에 쇠약한 몸을 의탁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 바로 화순 지역의 옛 동복현이었다. 현재 물염정 가에는 김병연과 그의 시를 기리는 몇 개의 석비들이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